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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을 느끼기 전에 기록부터 하게 된 이유

📑 목차

    감정보다 먼저 손이 움직이던 순간의 시작 

    어느 순간부터 감정은 느끼는 대상이 아니라 정리해야 할 정보가 되었다. 기쁨이 찾아오면 왜 기쁜지부터 분석했고, 슬픔이 밀려오면 그 감정이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를 먼저 기록했다. 감정이 지나간 뒤 남는 여운보다, 그 순간을 놓치지 않기 위해 적어 두어야 한다는 압박이 더 컸다. 웃고 있는 내 얼굴을 보며 “지금 웃고 있다”라고 메모하는 습관, 화가 나면서도 “분노의 원인 3가지”를 정리하는 행동은 더 이상 낯설지 않았다. 감정을 느끼기도 전에 기록부터 하게 된 이유는 단순한 성향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것은 이 시대를 살아가며 감정을 대하는 방식이 어떻게 바뀌었는지를 보여주는 하나의 증상이었다. 감정 기록 습관은 나를 보호하는 도구이자, 동시에 나를 감정으로부터 멀어지게 만드는 장치가 되었다.


    감정을 느끼기 전에 기록부터 하게 된 이유

    1. 감정을 통제해야 안전하다고 배운 사회 

    우리는 어릴 때부터 감정을 드러내는 법보다 감정을 통제하는 법을 먼저 배웠다. 울고 싶을 때는 참아야 했고, 화가 나도 이유가 명확해야만 허용되었다. 기분이 좋을 때조차 “괜히 들뜨지 마라”는 말을 들으며 자랐다. 감정은 자연스러운 반응이 아니라 관리 대상이었고, 통제되지 않은 감정은 미성숙함의 증거처럼 취급되었다. 이런 환경에서 자란 사람에게 감정은 느껴지는 순간 그대로 받아들이기에는 너무 위험한 것이었다. 대신 우리는 감정을 한 발짝 떨어진 곳에서 바라보는 법을 익혔다. 기록은 그 거리감을 만들어주는 가장 안전한 수단이었다. 글로 적는 순간 감정은 사건이 되고, 사건이 되는 순간 감정은 통제 가능한 것이 된다. 감정 통제라는 이름 아래 우리는 느끼는 법보다 정리하는 법에 익숙해졌다. 기록은 감정을 억누르는 도구가 아니라, 감정을 직접 마주하지 않아도 되는 우회로였다. 그렇게 우리는 감정을 느끼기 전에 기록부터 하게 되었다.

    감정 통제는 개인의 성향이라기보다 사회가 요구한 생존 방식에 가까웠다. 감정을 솔직하게 드러내는 사람보다 상황을 읽고 분위기를 조절하는 사람이 더 성숙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회사에서는 개인적인 감정보다 조직의 감정이 우선이었고, 가정에서도 갈등을 일으키지 않는 태도가 미덕으로 여겨졌다. 이런 환경 속에서 감정은 자유롭게 흐르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조절되어야 할 요소가 된다. 감정 통제를 잘하는 사람은 책임감 있는 사람으로 인식되었고, 감정을 그대로 드러내는 사람은 부담스러운 존재가 되기 쉬웠다. 그래서 우리는 감정을 느끼는 즉시 그것을 억제하거나 해석하려 들었다. 기록은 감정 통제를 실현하는 가장 합리적인 방법이었다. 글로 쓰는 순간 감정은 폭발하지 않고 정리된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감정을 다뤘다고 느끼지만, 실제로는 감정을 경험하기보다 관리했을 뿐이다. 감정 통제가 일상이 되면 감정을 느끼는 능력은 점점 둔해진다. 기쁨도 슬픔도 일정한 수위 이상 올라가지 않도록 스스로 제한하게 되고, 그 결과 감정의 스펙트럼은 점점 좁아진다. 기록은 통제의 증거로 남지만, 그 기록 속 감정은 점점 생동감을 잃어간다.


    2. 즉각적인 감정과 반응을 요구하는 디지털 환경 

    현대 사회는 감정을 천천히 느낄 시간을 허락하지 않는다. 메시지는 즉각적인 답장을 요구하고, SNS는 순간의 감정을 즉시 표현하거나 설명하길 강요한다. 우리는 항상 누군가에게 보일 상태로 존재하며, 그 속에서 감정은 사적인 경험이 아니라 공개 가능한 콘텐츠가 된다. 이 디지털 과부하 속에서 감정을 그대로 느끼는 것은 오히려 위험하다. 감정이 정제되지 않은 상태로 드러날 경우 오해를 낳거나 관계를 망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감정을 느끼기 전에 먼저 정리하고, 기록하고, 편집한다. 메모장에 감정을 써보며 “이걸 말해도 되는지”를 판단한다. 기록은 감정을 지연시키는 완충 장치다. 디지털 과부하가 일상이 된 환경에서 기록은 감정을 보호하는 필터가 되었고, 그 결과 우리는 감정을 경험하는 주체라기보다 감정을 관리하는 운영자가 되었다. 느끼는 속도보다 처리 속도가 중요해진 시대는 기록을 감정보다 앞에 두게 만들었다.

    디지털 과부하는 단순히 정보가 많다는 의미를 넘어선다. 그것은 감정조차 실시간으로 처리해야 한다는 압박을 포함한다. 우리는 알림이 울릴 때마다 즉각적인 반응을 기대받고, 그 반응에는 감정의 방향성이 포함되길 요구받는다. 하지만 즉각적인 감정 표현은 위험하다. 맥락이 생략된 상태에서 감정만 전달되기 쉽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감정을 느끼는 즉시 표현하지 않고, 먼저 기록하며 다듬는다. 기록은 디지털 공간에 감정을 올리기 전의 편집실 역할을 한다. 디지털 과부하 속에서 감정은 날것으로 존재할 수 없고, 반드시 가공되어야 한다. 이 가공 과정이 길어질수록 우리는 감정을 느끼는 주체가 아니라 감정을 조율하는 관리자처럼 행동하게 된다. 감정은 즉각적인 체험이 아니라, 게시 가능한 상태가 되었을 때 비로소 허용된다. 이런 환경에서 기록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가 된다. 느끼는 것보다 정리하는 것이 먼저인 구조 속에서 감정은 점점 지연되고, 지연된 감정은 결국 희미해진다.


    3. 감정을 상처받지 않기 위한 자기 방어 메커니즘 

    감정을 바로 느낀다는 것은 상처받을 가능성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일이다. 하지만 반복된 관계의 실패와 예측 불가능한 상황 속에서 우리는 점점 감정에 대한 방어벽을 높이게 된다. 기록은 가장 조용하고 효율적인 감정 방어 방식이다. 감정을 글로 옮기는 순간, 그것은 나와 분리된 대상이 된다. 슬픔은 ‘느낌’이 아니라 ‘문장’이 되고, 분노는 ‘폭발’이 아니라 ‘서술’이 된다. 이렇게 분리된 감정은 나를 해치지 않는다. 감정 방어를 위해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기록을 선택한다. 기록은 감정을 통제하는 동시에, 감정으로부터 거리를 유지하게 해 준다. 그래서 감정을 느끼기 전에 기록부터 하는 사람들은 종종 스스로를 차분하고 이성적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감정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두렵다는 사실이 숨어 있다. 기록은 안전하지만, 동시에 감정의 생생함을 희석시킨다.

    감정 방어는 의식적으로 선택한 전략이 아니다. 그것은 반복된 상처 속에서 자연스럽게 형성된다. 누군가에게 솔직하게 감정을 드러냈다가 상처받은 경험이 쌓이면, 사람은 감정을 드러내는 방식 자체를 바꾸게 된다. 기록은 그중에서도 가장 조용한 방어 수단이다. 기록은 누구에게도 상처 주지 않고, 누구에게도 상처받지 않는다. 감정을 글로 쓰는 동안 우리는 안전하다. 하지만 이 안전함은 대가를 요구한다. 감정 방어가 강화될수록 감정은 내부에서만 맴돌고 외부로 흐르지 못한다. 기록은 감정을 보호하지만 동시에 고립시킨다. 감정 방어를 위해 기록에 의존하게 되면, 실제 감정을 나누는 관계는 점점 부담스러워진다. 사람보다 글이 편해지고, 대화보다 메모가 익숙해진다. 이렇게 감정은 점점 혼자만의 영역이 되고, 혼자 감당해야 할 대상이 된다. 방어는 성공했지만, 연결은 약해진다.


    4. 기록이 감정을 대신하게 된 순간의 공허함 

    문제는 기록이 습관이 되었을 때 발생한다. 처음에는 감정을 이해하기 위해 시작한 기록이, 어느새 감정을 대신하는 행위가 된다. 우리는 감정을 느꼈다는 사실보다 “기록했다”는 사실에 안도한다. 슬픔을 충분히 느끼지 않았음에도 일기에 적었다는 이유로 괜찮아졌다고 착각한다. 이것이 반복되면 감정은 점점 멀어지고, 기록만 남는다. 감정 소외는 이렇게 시작된다. 감정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 접근하는 방법을 잃어버린 상태다. 기록은 여전히 남아 있지만, 그 안에는 체온이 없다. 감정을 느끼기 전에 기록부터 하게 된 이유는 우리를 보호하기 위함이었지만, 결국 우리는 감정과의 직접적인 연결을 잃어가고 있다. 이제 필요한 것은 기록을 멈추는 것이 아니라, 기록하기 전에 잠시라도 느끼는 용기다. 감정은 관리 대상이 아니라 경험의 중심이라는 사실을 다시 배우는 일, 그것이 이 시대에 가장 어려운 감정 훈련일지도 모른다.

    감정 소외는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상태가 아니다. 오히려 감정이 있다는 사실은 분명히 알고 있지만, 그것을 어떻게 다뤄야 할지 모르는 상태에 가깝다. 기록은 감정을 설명하지만, 설명은 경험을 대체하지 못한다. 우리는 일기에 슬픔을 상세히 적으면서도 실제로는 울지 않는다. 분노를 논리적으로 분석하면서도 분노가 지나간 자리에 남는 허탈함은 처리하지 못한다. 감정 소외는 이렇게 기록과 경험 사이의 간극에서 발생한다. 기록은 늘어나지만 감정의 밀도는 줄어든다. 감정을 느끼기 전에 기록부터 하게 된 이유는 분명 필요했고, 이해할 만한 선택이었다. 그러나 그 선택이 오래 지속되었을 때 우리는 감정을 다루는 다른 방법을 잃어버릴 수 있다. 이제는 기록을 부정할 필요는 없다. 다만 기록이 시작되기 전, 아주 짧은 순간이라도 감정을 있는 그대로 허용하는 연습이 필요하다. 기록은 그다음이어도 늦지 않다.